개발자가 된 지 만 11년이 지났다. 개인적인 회고 기록은 꾸준히 해왔지만 블로그에 한 번도 회고 글을 쓴 적이 없다. 기억을 다시 되돌아볼 겸 해서 지난 개발자 생활 11년을 정리해보았다.
쓰다 보니 내용이 길어졌는데 뒤를 돌아보니 나의 역량을 넘어선다고 생각한 것에 도전하고 그것을 이루었을 때 가장 성장할 수 있었다. 준비되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2009년 겨울 이스트소프트에 입사한 후 사내 프로젝트를 위주로 일해오다 처음으로 외부 사용자를 가지는 앱을 맡게 되었다.
알툴바는 당시 천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이었고 거기에 트위터 서드파티 앱을 개발해 넣는 프로젝트였는데 당시 실무 경험이 만 1년도 되지 않았던 내가 웹개발자로서는 혼자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당시 이스트소프트에는 대부분이 앱개발자였고 웹개발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데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생 수준의 Java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JavaScript는 경험이 별로 없던 때였다. SPA(Single Page Application)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인데 당시에는 아직 SPA라는 용어도 없었고 프론드엔드 개발자라는 단어도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리액트나 앵귤러와 같은 웹프레임워크는 아직 나오기 전이라 jQuery를 이용해 프론트엔드 개발을 하였고 스프링과 같은 서버 프레임워크 경험이 없던 나는 자바 서블릿을 이용해 서버개발을 하였다. 이전까지는 회사에서 닷넷프레임워크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서블릿을 이용해 서버 개발을 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서버 OS는 리눅스에 톰캣이었는데 리눅스도 톰캣도 경험이 거의 없었다.
당시 회사의 웹시스템에는 온갖 버그와 수동으로 처리해줘야 하는 일들이 있었고 팀의 막내였던 나는 그것을 같이 담당하며 개발을 진행했다. 업무시간에는 주로 그런 유지보수 업무를 해야 했고 알툴바 트위터는 주로 야근과 주말근무로 개발되었다. 일을 안 하는 주말에는 자바스크립트 책을 읽었다.
프로젝트 일정은 빡빡하게 잡혀있었고 나는 몇 달간 회사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고 있었다.
몇 번 일정에 차질을 빚긴 하였지만 결국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출시되었다. 트위터 프로젝트이니 트위터에서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는데 수많은 사용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보람을 느꼈다.
출시 후 9년쯤 지났을 때 나는 독일에 있었고 어느 날 갑자기 궁금해져 알툴바 트위터로 접속을 해봤는데 아직도 서버가 돌아가고 있었다. 10분 넘게 스크린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당시 플래시에 관심이 있던 나는 스티브잡스의 '플래시는 HTML5로 대체될 것'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사내 웹 개발자 워크샵에서 그것과 관련한 발표를 하였는데 얼마 후 당시 본부장이셨던 정상원님(현재 대표이사님)께서 우리팀을 지나가다가 "야 누가 HTML5 관련해서 발표 한번 해라"라고 하셨고 팀장님은 "어 그거 상현씨가 하면 되겠네"라고 하셔서 전사에 HTML5 발표를 하게되었다.
이후 나의 멘토였던 김용현님은 강연을 다니거나 책을 집필하시는 분이었는데, 나에게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 HTML5 관련하여 기고를 제안하셔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쓰고 얼마 후에는 "HTML5 책 한번 써보시는 것 어때요?"라는 제안을 하셨다. 아직 실무 경험이 2년이 채 되지 않은 나는 겁없게도 "네 한번 해볼게요"라고 하였다.
알툴바 트위터를 개발하며 자바스크립트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당시까지 공개된 HTML5의 많은 부분은 자바스크립트 API에 관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달간 저녁과 주말을 투자하였다.
출판사도 회사와 비슷하게 무리한 일정을 줘서 자극하는 방식을 쓰는데 어쨌거나 그것이 계속 열심히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긴 하였고 고생 끝에 책이 나왔다. 지금에 와서 10년 지난 HTML5 책을 아무도 사보지 않겠지만 혹시 관심이 있다면 사보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의 인생을 가장 바꿀 책은 당신이 쓸 책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것 같다.
이스트소프트는 젊은 회사였고 그에 맞는 재미있는 문화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입사 시 100문 100답 형식의 자기소개를 사내 게시판에 올리는 것이었다. 100문까지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목표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었다. 지나서 목표에 "책을 써보고 싶다"는 내용을 적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돌이켜보니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이직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2~3년 한 회사에서 일을 해보았으니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다보니 딱히 보여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발 블로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나의 첫 글 스택오버플로 활용하기를 발행하였다. 글을 쓰고 트위터에 올렸는데 어떻게 글이 퍼지게 되었는진 잘 기억나지 않지만 꽤 많은 분들이 글을 좋아해주었고 하루 아침에 팔로워가 10명 이상 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직을 위해서는 카카오와 제니퍼소프트에 지원을 하였는데 책을 쓴 경험과 스택오버플로 덕분인지 둘 다 서류에 통과하였지만 최종 합격까지는 가지 못하였다.
제니퍼소프트는 이력서를 제출한 뒤 방송을 탔는데 복지와 사장님께서 하신 "좀 놀면 안되나요?"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너무 이력서가 많이 왔다고 하시며 원래 연락주기로 하신 것보다 늦게 답을 주셨는데 높은 경쟁률을 뚫고 이력서가 통과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합격 연락을 듣고는 전국대회를 앞둔 채치수 만큼이나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면접관님께서 시간이 조금 남는다며 건물 구경을 시켜주셨다. 수영장이 있었고 1층은 카페가 있으며 사무실은 채광이 잘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해주신 것이었지만 건물을 둘러보고 나니 더 입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떨림은 여전히 멈추질 않았다.
첫 면접에서는 기술 이야기 보다는 개인적인 가치관, 사유와 같은 것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채용공고에서도 적혀있는 내용이었고 예상할 수 있을 만한 질문들이었지만 당시에는 보통 면접과는 다른 질문을 들으니 더 정신이 없어졌고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한 채 면접이 마무리되었다. 결과는 물론 불합격이었다.
당시에는 많이 아쉬웠지만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때 오픈되었던 포지션이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내가 장기적으로 하고 싶은 분야는 아니었고 좋은 복지와 문화를 가진 제니퍼소프트에서 일했다면 나의 장기적인 목표였던 해외취업을 위해 덜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아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결국 그것이 더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인생에서 자주 겪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잡았던 목표는 5년 후 해외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직을 준비하면서도 해외취업에 도움이 될만한 회사가 없을까를 생각하며 찾아보았는데 그 중 발견한 것이 타파스미디어이다.
타파스미디어는 태터툴즈를 서비스했던 태터앤컴퍼니 공동대표 후 구글에 매각한 김창원 님께서 창업하신 회사로 한국에서 성공한 웹툰서비스 모델을 글로벌 서비스로 제공하는 것이 목표인 스타트업이다.
스프링 봄싹 스터디 모임 메일링 리스트에서 우연히 채용공고를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두고 서울에서 일할 개발자를 뽑는다는 이야기였는데 여기에 가면 해외취업에 도움이 되겠구나 싶었다. 당시 카카오에 두 번째로 지원해 진행 중이었는데 타파스미디어는 채용과정은 굉장히 빠르게 진행이 되었고 먼저 오퍼를 받았다.
카카오 결과를 기다리며 아내에게 "둘 다 합격하면 어떡하지?"를 물었는데 "아무래도 우리 해외로 나가고 싶으니 타파스미디어가 낫지 않을까?"라고 하였고 나도 그런것 같다고 하였다.
카카오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카카오 지원자 중 최종면접에서 두번 떨어진 지원자는 아마 몇명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타파스미디어의 개발자는 모두 한국인이었지만 기획자, 디자이너들은 미국인이었고 그래서 개발자끼리 대화할 때가 아니면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였다. 16시간 시차가 있어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은 자주 있지 않았고 주로 이메일이나 이슈작성 등을 할 때 영어를 써볼 수 있었다. 해외취업을 하고 싶은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회사에서는 영어학습비 지원도 해주었는데 덕분에 민병철유폰 전화영어를 꾸준히 할 수 있었다.
업무환경은 우분투 데스크탑에서 맥북으로, 깃랩에서 깃헙으로, 이클립스에서 인텔리J로 넘어갔는데 모두 만족스러웠다. 이전 회사에서도 풀스택으로 일했었지만 CSS와 HTML 작업을 해주는 분들이 있었고 서버 운영을 담당하는 시스템엔지니어링 팀도 따로 있었다. 하지만 타파스미디어는 워낙 작은 회사니 CSS부터 프론트엔드, 백엔드, 서버 운영, 데이터베이스까지 모든 부분에 참여해야 했다. 회의나 다른 잡다한 일 없이 개발을 많이 해볼 수 있었고 그것이 좋았다.
타파스미디어에서의 생활은 꽤 만족스러웠지만 여전히 해외취업에 대한 열망은 있었다. 해외취업을 처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갔을 때였다. 그 문화와 생활이 좋았고 "내가 이런걸 경험 못해보고 평생 한국에서만 살았구나. 언젠가 다시 해외로 나가서 살아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타파스미디어에서 회식 같은 것을 자주하진 않았는데 하루는 직원들끼리 맥주를 마시러 간 일이 있었다. 거기서 함께 일하던 동료가 "상현님은 꿈이 뭐에요?"라는 질문을 하였다. 나는 "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요."라는 대답을 하였다.
해외로 나가고 싶은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 한국의 미세먼지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아내는 천식이 있었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기침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일 년쯤 영어를 어느정도 쓰며 일을 하다보니 자신감이 조금 생겼고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쓰기 시작하였다. 스택오버플로 Jobs 페이지를 통해 주로 지원을 하였는데 리로케이션이나 비자에 대한 지원과 같은 사항이 잘 적혀있어 좋았다. 초반에 두세군데 정도 지원을 하였는데 그 중 스웨덴의 한 스타트업에서 과제를 내주었고 열심히 해서 제출하였더니 면접을 잡아주었다.
영어로 한시간 넘게 면접을 보고 나왔는데 밖에서 내용을 조금 들은 아내의 표정이 안 좋았다. 내 영어가 엉망이었단다. 결과는 탈랐이었다. 고맙게도 "너 영어가 부족해서 안되겠어"라는 솔직한 피드백을 주었다. 많이 아쉬워 탈락 메일에 구질구질하게 "뽑아줬으면 금방 잘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답변 메일도 썼다. 하지만 이것도 지나서 보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날씨도 지독한데 스웨덴이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그 후에도 계속 지원을 하여 10군데 이상 지원했지만 다른 곳에는 서류통과 조차도 되지 않았다. 뭔가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마존으로부터 서울 채용 행사 초대를 받았다. 인터뷰 한달 전쯤 일정이 잡혔고 그간 열심히 준비하였다. 아마존이 선호하는 회사는 아니었지만 좋은 회사인 것은 확실하고 "내가 뭐라고"라고 생각하며 떨어지면 경험이라도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지원을 하였다. 시애틀과 밴쿠버 중 하나에 가게 될 것이라고 리쿠루터가 이야기하였고 나는 밴쿠버가 좋겠다는 생각하였다.
코딩인터뷰에 Dynamic Programming 문제가 나왔고 최적화된 방법으로 푸는 것에 실패하였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하지만 준비과정과 면접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새로운 양식으로 커버레터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것 덕분인지 서류통과가 되기 시작했고 주로 다음 단계는 과제나 온라인 코딩 테스트였다. 회사일도 만만치 않았는데 저녁과 주말에는 영어, 코딩, 개발, 면접을 공부하는 나날이었다.
면접을 보고 떨어지고가 반복되었고 몸은 지쳐갔다.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7월쯤이 되니 대상포진이 왔다. 그때 진행 중이던 회사가 Zalando였다. 일 년 반 동안 대략 25번 정도의 거절 경험을 겪었고 그것이 몸에 스트레스가 되어왔던 것 같다. 마지막 인터뷰를 볼때는 대상포진약을 먹고 있을 때였다. 다행히 아주 초기에 발견해 통증은 없었는데 독한 약을 먹으니 매우 피곤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취업준비는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진행 중이던 회사에서 합격 소식이 왔다. 오퍼를 받고 2~3달 정도 후에 출근하는 일정이었다.
실패가 반복되면서 목표를 취업이 아닌 실패 백 번 해보는 것으로 바꾸었더니 실패를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취업을 두고 거창한 예를 드는 것 같지만 다이슨은 진공청소기를 개발하기 위해 5126번을 실패했다고 한다.
그렇게 독일에 오게 되었고 집 찾기에 성공해 지금 사는 집으로 들어왔다.
앞선 글 "해외취업과 영어의 어려움"에서 썼듯이 영어는 어려웠다. 한국에서 나의 강점 중 하나는 사람을 잘 사귀는 것이었는데 말이 잘 안 통하니 팀에서 겉도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AWS, OAuth2, Microservices, K8s, Docker 등 경험이 거의 없는 다양한 기술을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기술적인 부분까지 이해가 어려우니 더욱더 스트레스였다. 계속해서 영어를 공부해야 했고 휴가를 이용해 회사에서 사용하는 기술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당시 팀에서 다루던 그 주제 중 하나가 Conversational Commerce 그러니까 챗봇을 통한 판매였다. 알렉사를 시도해보던 중 구글로부터 연락이 왔다. 구글은 독일 구글홈 출시에 맞추어 챗봇이 미리 개발되어 있기를 바랬고 그래서 몇몇 주요 회사들과 접촉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 회사였다. 그 프로젝트 개발을 혼자 맡게 되었다.
구글은 굉장히 촉박한 일정으로 연락을 주었고 기획과 테스트 기간을 제외하면 사실상 개발할 수 있는 시간은 한달 가량이었다. 나의 첫 챗봇이었으니 구글 어시스턴트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DialogFlow를 통해 챗봇은 어떻게 개발해야하는지 등을 빠르게 학습해야 했다.
회사의 첫 챗봇이었고 구글홈의 출시를 통해 공개되는 중요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일정에 맞추기 위해 독일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야근과 주말근무를 하였고 결국 시간 내에 출시를 하였다. 프로젝트는 그 해 회사의 혁신 제품으로 선정되었고 유럽내 40군데 이상의 언론에 소개되었다.
이전까지는 회의시간에 말도 잘 못하는 이미지였지만 이 프로젝트 이후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롤모델로 경영진 쪽에서 추켜세워 주었다. 업무에서 자신감을 갖게된 첫번째 계기였다.
뒷이야기를 하자면 구글 챗봇은 홍보적인 면에서는 성공이었지만 챗봇의 여러가지 한계 때문에 판매실적으로는 실패였으며 다음 챗봇을 출시하였지만 여전히 큰 성과가 없어 오래 지나지 않아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챗봇 서비스를 중단하는 뉴스 미디어들이라는 주제로 테크니들에 글을 쓰기도 했었다.
당시 일하던 신사업 팀에서는 매출을 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찾기 위해 데이터 사이언스를 적용해보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를 고용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회사 내에서 개발자들을 상대로 머신러닝(ML)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였고 그것에 참여하게 되었다. 자료는 Coursera에서 가장 인기있는 강좌인 Andrew Ng의 Machine Learning을 이용하였다. 11주짜리 코스인데 배경지식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쉽지 않았고 저녁과 주말을 이용해야 과제를 제대로 해낼 수 있었다.
얼마 후 팀의 경영진 중 한명이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채용공고를 공유하며 지인이 있으면 추천하라고 하였다. 나는 이제 갓 ML 수업을 시작한 상태였지만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를 뽑기 전까지 팀의 데이터 사이언스 프로젝트를 맡아도 되겠냐고 문의하였고 흔쾌히 그래도 좋다는 답변을 얻었다.
Andrew Ng의 ML 코스는 기본을 익히기에 좋았지만 실무에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은 아니었다. 수업을 수료하고 나니 Python을 이용한 응용 데이터 사이언스 수업이 추천강좌로 메일로 왔고 이것을 이어서 공부하였다.
Python이 능숙하지 않은데다 pandas, numpy, scikit-learn 등 처음보는 라이브러리들을 공부해야 했지만 공부한 것을 프로젝트에 바로 써먹을 수 있으니 즐거웠다. 마침 회사에서 Databricks라는 Spark 기반의 데이터 분석 및 처리 플랫폼을 도입하였고 덕분에 공부해야할 거리는 늘었지만 서버를 따로 세팅하지 않고 데이터처리를 할 수 있어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그렇게 데이터 분석, 모델링, 배포, 데이터파이프라인, 백엔드까지 모두 맡아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맡고 있던 다른 업무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프로젝트 진행이 수월하지만은 않았지만 결국 성공적으로 출시가 되었고 이 프로젝트는 몇년간 팀에서 실험했던 어떤 마케팅 방식보다 효과적으로 매출을 상승시킨 결과를 내었다.
2019년을 열며 쓴 블로그 글 "내가 받은 최고의 커리어 조언"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특히 오종빈님께서 트윗해주시며 큰 인기를 얻었다. 오랜만에 연락한 전 직장 동료가 글을 잘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CEO님께서는 부사장(VP)이나 상무(SVP)가 될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 오종빈(Jongbin Oh) (@ohyecloudy) January 3, 2019
“저는 본인의 영역 이상의 일을 이미 하는 직원을 찾아서 그들을 진급시킵니다.” - 내가 받은 최고의 커리어 조언 https://t.co/z2SoGZkveu
몇 년간 영어로만 일하며 살았지만 여전히 영어가 부족했고 링글이라는 서비스를 발견하여 수강해보았다. 전화영어를 오래하였지만 필리핀쪽은 생각보다 잘못 가르쳐주는 것이 꽤 있고 미국쪽도 수준있는 대화를 나누기는 쉽지 않았다.
링글은 그런 문제점을 해결한 서비스인데 값이 싸진 않지만 해볼만 하다고 생각하였다. 가장 큰 투자는 돈 보다 시간이었다.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써야했고 수업 후에는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으며 잘 못된 점을 개선해 나갔다.
녹음된 음성을 들으며 생각보다 짦은 시간에 나의 말하기 방식의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것을 고치는 방식으로 연습해나가다보니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 면접관으로 활동하는 것에 부담이 있었다. 내가 말을 했는데 못알아들으면 "내 발음 때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주눅이 들기도 했었다. 수업 후 자신감을 많이 상승시킬 수 있었고 덕분에 면접관으로도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참고로 링글과는 전혀 개인적인 이익관계가 없으며 어떤 서비스라도 잘 만들어진 서비스에 개인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영어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링글에 관심이 있다면 이 초대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체험을 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초대링크처럼 나에게도 혜택이 온다.) 링글 사이트로 바로 들어가 수업신청을 할 수도 있다.
이때는 관리직 쪽으로 갈 것인가 개발자로 남을 것인가를 선택해야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는데 고민 끝에 관리직보다는 리더십을 가진 개발자가 되는 것이 나의 장기적인 목표에 필요한 것들을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개발자로 남는 것을 선택하였다. 하루종일 미팅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재택근무를 시작하였다. 시간이 더 많아지고 더 건강해졌다. 이것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글 독일에서의 재택근무에서 다루었다.
데이터분석가, 마케터 동료들이 점심을 함께 먹던 중 파이썬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파이썬 실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키울겸해서 스터디 그룹을 시작하였다. 국내에는 나의 첫 파이썬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Python Crash Course를 교재로 이용하여 매주 한시간씩 만나 질문을 받고 내용과 관련하여 실무에 필요할만한 추가적인 내용을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그 책을 끝낸 후에는 pandas를 개발한 웨스 맥키니가 쓴 파이썬 라이브러리를 활용한 데이터분석 (Python for Data Analysis)을 보기 시작하였다.
다들 분명한 목표가 있으니 성실하게 임했다. 개발을 처음해보는 동료들의 질문을 받는 것은 신선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제 약 일 년이 지났는데 파이썬을 이용해 데이터 분석을 하고 문자를 처리하는 등 실무적인 문제를 코딩을 이용해 해결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팀장은 이것을 전사로 확장해보자는 제안을 하였고 지금은 어떻게 하면 데이터분석을 원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효과적으로 파이썬 교육을 할 수 있을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2020년은 팀을 옮긴 해이기도 하였는데 데이터사이언티스트들이 모인 리서치팀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AWS SageMaker, EMR, TensorFlow, Airflow 등 새로운 기술을 다뤄야했고 이미 구축되어 있는 방대한 시스템을 이해해야 했다.
데이터사이언티스트들이니 엔지니어링쪽 문제에 능숙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그런 부분들을 찾아 워크샵을 하거나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하였다.
팀에서 내가 가장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경력이 쌓일 수록 그것이 쉽지 않았다. 리서치팀에서는 최소한 데이터사이언스에 관해서는 내가 가장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얼마 전 누군가가 나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꿈을 꾸었다. 나는 "세계 어디서든지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요."라고 대답을 하였다. 잠에서 깨어서 생각해보니 나는 꿈을 조금은 이루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 시절 중소기업에서 근로장학생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직원들이 하루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슨 전공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에게도 질문을 하자 나의 전공인 “컴퓨터공학이요”라고 대답했는데 “아직 필드에 나와보지 않아서 그렇다”라는 답을 들었다. 11년이 지난 지금 아직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